한철유(韓喆裕)
[진사시] 정조(正祖) 19년(1795) 을묘(乙卯) 식년시(式年試) 식년진사 3등(三等) 37위
[인물요약]
UCI | G002+AKS-KHF_13D55CCCA0C720B1769X0 |
자 | 공보(公保) |
생년 | 기축(己丑) 1769년 |
합격연령 | 27세 |
본관 | 청주(淸州) |
거주지 | 경(京) |
[관련정보]
[이력사항]
전력 | 유학(幼學) |
부모구존 | 자시하(慈侍下) |
생부구존 | 구경하(具慶下) |
[가족사항]
[출전]
병가(兵家)의 급선무는 먹을 것을 풍족하게 하는 것이니, 병사가 있더라도 먹을 것이 없다면 이는 병사들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공명(孔明)이 기산(祁山)에 출동했을 적에 어찌 이러한 것에 대해 미리 강구하지 않아 매번 군량이 떨어져 물러났다가 맨 나중에서야 목우유마(木牛流馬)의 제도와 둔전(屯田)의 계책을 낸 것인가?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적을 죽이는 것은 급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큰 집을 가지고 있는데 적의 침입을 받아 쫓겨나 바깥 담장 밑에 있다면 적을 죽이는 것을 어떻게 천천히 할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이 말이 참으로 공명의 본심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적을 죽이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적을 헤아리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가령 한밤중 집에 침입한 적이 있더라도 의당 나의 무기를 가지고 좋은 위치를 확보하여 반드시 사로잡을 수 있는 형세를 만든 뒤에야 그 적을 내쫓든 죽이든 마음대로 할 것이니, 어찌 맨손으로 적의 칼날에 대들겠는가. 공명과 같이 지혜가 있는 자는 필시 자기편을 먼저 헤아리고 상대의 형편도 헤아렸을 것이니, 군병은 얼마나 써야 하고 군량도 얼마나 필요하며 서로 얼마 동안이나 대치할지에 대해서 아마 충분히 계획을 세워 놓았을 것이다. 매년 군사를 퇴각시키는 것보다는 차라리 조금 시일을 지체시키면서 군량을 많이 저축하여 장기적인 방책을 세우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성패(成敗)와 이둔(利鈍)은 신이 미리 알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한 말은 바로 공명이 당당하게 행한 것을 나타낸 것으로 ‘국궁진췌(鞠躬盡瘁)’의 뜻이 조금 지체되거나 속히 한다고 해서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을 것 같다. 이것은 혹시 별달리 불가피한 형세가 있어서 그런 것인가?
군병을 쓰는 데에 있어서 빼놓아서는 안 되는 것이 양식인데, 공명과 같이 지혜로운 자가 어찌 이에 대해 생각이 미치지 않았겠습니까. 그의 뜻에는 필시 ‘관중(關中)과 낙양(洛陽)의 것은 바로 우리의 관곡(館穀)이고 허창(許昌)과 영천(潁川)도 우리의 바깥 창고이니, 만약 한중(漢中)에서 계속해서 실어 온다면 이는 좋은 계책이 아니다’고 생각하였는데, 한(漢) 나라의 국운은 더 이상 지탱할 수가 없고 적의 칼날은 더 이상 막을 수 없게 되어 기산에 출동한 군사들이 거듭 식량이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각(邸閣)의 목우유마와 위남(渭南)의 둔전을 임종하기 6개월 전에 처음으로 만든 것에서도 ‘온갖 정성을 다 바쳐 죽은 뒤에나 그만두겠다[鞠躬盡瘁 死而後已]’는 뜻을 볼 수가 있습니다. 가령 기산에 여섯 차례 출동하기 전에 미리 준비를 했더라도 군사들은 기산과 오원(五原)의 들판에서 늙어갈 뿐이었을 것이니, 승패의 운수에 무슨 보탬이 되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