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원

한수원(韓壽遠)에 대하여

 

1602년(선조 35)∼1669년(현종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구(子耉).우의정 한응인(韓應寅)의 손자로, 동지돈령부사 한덕급(韓德及)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참판 김일(金逸)의 딸이다. 김장생(金長生)과 정엽(鄭曄)의 문인이다.1633년(인조 11) 생원과 진사의 양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동료 유생들과 함께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상소하였다가 허락되지 않자 과거시험을 단념하고 은거하였다.그뒤 아버지의 요청으로 벼슬길에 나가 음보로 감찰이 되었으며, 이어서 공조좌랑·예산현감·의금부도사·사도시주부·종묘서영·안성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효종의 북벌계획을 도와 강화를 요새화하는 데 힘썼다.그뒤 호조정랑을 거쳐, 이천부사·한성부서윤·대구부사를 지낸 뒤 상주목사에 재직중 임지에서 죽었다.

[참고문헌]

孝宗實錄
國朝人物考

[집필자]

강성조(姜聖祚)
출처: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행장

상주 목사(상주목사) 한공(한공) 행장 임자년(1672, 현종13)

본관은 청주(청주)이다.
증조는 휘 경남(경남)으로 부사직(부사직)을 지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증조비(증조비)는 경주 김씨(경주김씨)로 정경부인(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휘 응인(응인)으로 우의정 청평부원군(청평부원군)을 지냈고 시호는 충정공(충정공)이다. 조비(조비)는 전주 이씨(전주이씨)로 정경부인이다.
고(고)는 휘 덕급(덕급)으로 가선대부 동지돈녕부사 청녕군(청녕군)이다. 비(비)는 광주 김씨(광주김씨)로 정부인(정부인)이다.

공의 휘는 수원(수원), 자는 자구(자구)이다. 청주를 본관으로 하는 한씨는 고려조 태사(태사) 난(난)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 휘 확(확)이 있는데 광묘(광묘)를 도와 좌의정에 올랐고 시호는 양절(양절)이다. 사직공은 그 5대손이다. 충정공 및 청녕군은 모두 비지(비지)가 있으니 집안 대대로의 덕업이 실려 있다. 김 부인은 사계(사계) 김장생(금장생) 선생의 계녀(계녀)이다.
공은 만력 임인년(1602, 선조35) 6월, 병오일인 16일에 서울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진중하고 단정하였다. 경상(경상) 집안에서 자랐으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일가들이 모두 외할아버지를 빼닮았다고 일컬었다. 사계 선생 또한 사랑하여 문학과 행실로 가르치며 따로 노복을 내려 장려하였다. 조금 자라서는 《논어》, 《맹자》 등의 서적을 모두 수학하였다. 또 정수몽(정수몽)의 문하에 나아갔는데 더 배우고자 한 것이다.
숭정 계유년(1633, 인조11)에 사마 양시에 합격하고 국상(국상 성균관)에 들어갔다. 을해년(1635)에 생도들과 함께 율곡(률곡), 우계(우계) 두 분 선생을 문묘에 종사하는 논의를 주창하여 상소를 다섯 번 올렸으나 허락받지 못하자 반대 의론이 무성하게 일어났다. 이때 경과(경과)가 있었는데 공이 동료들과 함께 모두 시험에 응시하지 않음으로써 뜻을 보였다.
다음 해 병자년(1636) 봄에 강릉 참봉(강릉참봉)에 제수되었는데 또한 나아가지 않았다. 겨울에 오랑캐의 변란이 일어났고 난이 평정된 뒤에도 그대로 서울에 들어가지 않고 호우(호우 충청도)에서 객지 생활을 한 것이 4년이었다.
경진년(1640)에 사산감역(사산감역)에 제수되었는데, 어버이가 연로하였기 때문에 출사하였다. 신사년(1641)에 사헌부 감찰에 올랐다. 임오년(1642)에 공조 좌랑에서 외직으로 나가 예산 현감(예산현감)에 보임되었다. 정사를 정밀하게 하였으므로 아전은 단속되고 백성은 따랐다. 무자년(1648)에 임기가 차서 체직되어 들어왔다.
기축년(1649)에 의금부 도사를 거쳐 사도시 주부(사도사주부)가 되었다. 경인년(1650, 효종1)에 종묘서 영에 오르고 외직으로 나가 안성 군수(안성군수)가 되었다. 본군에는 백성들이 사모하여 세운 사계 선생의 유애비(유애비)가 있다. 1년의 재임 기간 동안 백성을 구휼하고 풍속을 순후하게 하는 정치를 하여 선조가 남긴 규범을 훼손하지 않았다고 사람들은 말하였다. 한 요망한 무당이 부적을 넣은 물로 병을 치료한다고 칭하여 백성들을 속이고 꾀었다. 경외의 사인, 서민들이 모두 휩쓸리어 그가 있는 곳은 시장 같았다. 공이 잡아서 곤장을 쳐 죽이니 듣는 자들이 시원해하였다. 다음 해 파직되어 돌아왔다.
갑오년(1654, 효종5)에 강화부 경력(강화부경력)에 제수되었다. 당시는 효종이 뜻을 날카롭게 세워 군무(군무)를 정비할 때인데 강화부는 바로 서울 어귀의 보장(보장)이다. 공이 전(전)을 받들어 궐에 나아가니 상이 특별히 인견하여 환란에 대비하는 대책을 자문하였다. 이에 공이 즉시, 마니산(마니산)에 나무를 길러 후일 목책을 설치할 준비를 하고, 불랑기(불랑기) – 병기(병기)의 이름이다. – 를 널리 제조하여 나룻가에 돌격해 오는 군사를 막으며, 연해(연해) 세 곳에 보(보)를 설치하여 요해지를 막아야 한다고 주청하니, 상이 옳다고 하고 즉시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일을 주관하는 자가 먼저 자기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노하여 몇 달이 안 되어 사소한 일을 빌미로 아뢰어 파직하였다.
을미년(1655)에 다시 서용되어 호조 정랑이 되었는데 매우 엄하게 자신을 단속하였고 공금 착복을 근절시켰다. 노리(노리)가 전하는 말에, 근세에 이 관직을 지낸 자 가운데 이렇게 한 자가 없었다고 한다. 병신년(1656) 5월에 외직으로 천안 군수(천안군수)에 제수되었으나, 당시 호조 판서인 상국 홍명하(홍명하)가 부지런하고 청렴하다고 계청하여 그대로 남게 하였다. 혹자가 공의 어버이가 연로하여 봉양이 급하다는 것을 말하니, 홍공이 말하기를,

“나라를 위해 개인 사정은 봐주기 곤란하다.”
하였다.
정유년(1657)에 이천 부사(이천부사)에 제수되었다. 기읍(기읍)이 군정(군정)이 행해지지 않아서 다방면으로 침학을 당하였는데 공이 무마하고 통제하기를 합당하게 하니 묵은 폐단이 다 혁파되었다.
경자년(1660, 현종1) 6월에 부친상으로 인해 관직을 떠나니 군사들이 그를 위해 특별히 자금을 내어 비석을 세워 그 은혜를 기렸다. 신축년(1661)에 모친상까지 당하였다.
계묘년(1663)에 복상(복상)을 마치고 곧바로 한성부 서윤(한성부서윤)에 제수되었다. 미처 나가 사은하기도 전에 대구 부사(대구부사)에 제수되었다. 대구부는 본래 업무가 매우 많은 곳으로 일컬어졌고 또한 감영이 있었다. 공은 상관을 섬김에 뜻을 굽힌 적이 없었으며, 호족들을 다스림에 관대하게 용서한 적이 없었다. 다른 고을의 적체된 송사가 모두 공에게 넘어왔는데 송사에 진자도 감히 비난하지 못하였다. 영남의 선비 풍속이 잘못되어 보고 듣는 것이 이욕(이욕)에 쏠려 있었다. 공이 직접 학교에 가서 계도하는 뜻을 지성껏 드러냈으므로 인심이 믿고 따라서 풍습이 그 때문에 점차 변화되었다.
을사년(1665)에 군기를 정밀하게 준비하였다 하여 표리(표리)를 하사받았다. 병오년(1666)에 난폭한 도적을 붙잡아 벤 공으로 승자(승자)의 명을 받았다. 이에 공이 언짢은 표정으로 말하기를,

“백성을 위해 해를 제거하고 관직에 있으면서 군무를 다스리는 것은 본래 직분인데, 감히 포상을 바라겠는가.”
하였다.
무신년(1668)에 임기가 차서 체직되어 돌아왔다. 기유년(1669)에 또 상주 목사(상주목사)에 제수되었다. 상주는 영남 지방에서는 큰 도회지인데 나누어 준 4만여 곡(곡)의 환곡 가운데 그해 거두어들이는 것이 겨우 1만 곡이며, 수백여 동(동)의 공포(공포) 가운데 포흠한 것이 절반을 넘어 일개 폐읍(폐읍)의 형세가 되었다. 공이 처음 부임하여 정력을 다하여 바로잡았다. 비록 병이 있더라도 하루도 문서를 살피지 않은 날이 없었고, 좌우에서 혹 조금이라도 쉬기를 권하면 공이 받아들이지 않고 말하기를,

“내가 비록 늙었지만 어찌 국록을 먹으면서 일을 게을리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마침내 과로로 병이 심해져서 이해 12월, 정묘일인 8일에 관저에서 임종하였으니, 향년 68세였다. 경술년(1670, 현종11) 2월, 갑자일인 6일에 남양(남양) 유현(뉴현) 선영 아래 곤향(곤향) 언덕에 반장(반장)하였다.
공의 품성은 평이하고 곧았으며 겉을 꾸미고 장식하는 것을 일삼지 않았다. 효성스럽고 우애 있고 성실하고 신의가 있음은 천부적인 것이었다. 양친을 50년 동안 모시면서 뜻으로나 물질로나 부족함 없이 봉양하였다. 청녕군(청녕군)이 연로한데 중자(중자)를 잃고는 아도(아도)의 질환이 생겨 좌우에 사람이 없으면 눈앞이 자욱하여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였다. 이에 공이 종일토록 곁에서 모시면서 혹 여종에게 노래를 시키거나 혹은 자제에게 시를 읊고 놀이를 벌이도록 하여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애썼다. 집에 있을 때나 고을에 있을 때나 작은 잔치를 자주 벌였는데 반드시 청녕군의 동갑 친구들을 불러들여서 낙사(락사)의 고사를 모방하였다. 청녕군과 김 부인이 모두 80세를 넘기니 세속에서 말하는 회근(회근)의 날을 맞아 친척과 빈객을 모두 초청하여 3일간 크게 잔치를 베풀어 헌수를 올리고 경사를 축하하였다. 공이 당시 지부(지부 호조)에 있었으므로 서리들이 연회 물품을 다투어 올리자 공이 일절 거절하며 말하기를,

“부모에게 올리는 물품을 어찌 뇌물로 쓸 것인가.”
하고 모두 자기 집에서 마련하여 갖추었는데 지극히 풍성하고 정결하였으니, 그 정성스레 봉양하여 구차히 하지 않은 것이 이와 같았다. 거상(거상)하게 되어서는 공이 이미 몸을 훼상하지 않을 나이가 되었지만 예제(예제)를 집도하는 것이 더욱 확고하였다. 습렴(습렴)부터 발인, 안장(안장)까지 직접 정성스럽고 신중하게 하여 유감이나 후회가 남지 않았다. 슬퍼하여 곡읍하기를 절도에 지나쳐서 두 눈에 눈물이 거의 마르게 되었다. 전후로 거상하는 4년 동안 여차에서 오래도록 거처하며 한 번도 내당(내당)에 발을 들인 적이 없었다. 제사의 예는 한결같이 사계 선생의 규범에 따랐는데, 선대에 시행한 것 중 혹 합당치 못한 것이 있으면 차례로 바꾸고 고쳐서 융통성 있게 시행하였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 행적을 드러내지 못하게 하니 추모하는 정성은 오래될수록 더욱 돈독해졌다. 그가 남쪽 고을의 수령이 되어 나가면서 묘소에 참배하고 떠날 때에는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여 차마 쉽게 떠나지 못하는 기색을 보이니, 마부까지도 눈물을 머금었다.
아우와 누이를 지극히 사랑하여 혹 과실이 있더라도 반드시 조용히 지적하여 경계시켰고 호되게 꾸짖고 벌한 적이 없었다. 종족에게는 돈독하고 화목하게 대하였고 동료, 친구에게는 온화하고 경건하게 대하였다. 집에서는 동복(동복)들에게 매질하는 형벌을 행하지 않았으며 관청에서는 무섭고 거만한 기색을 하리에게 보이지 않았으니, 이는 모두 겉으로 드러난 공의 실덕(실덕)이다. 지방 고을을 맡아서는 가혹하게 거두어들이는 것을 능사로 여긴 적이 없었고 오직 민력(민력)을 덜어 주고 공직을 봉행하는 데에 마음을 썼다. 부임하여서는 향약(향약)을 정돈하고 기로들에게 연회를 베풀었으며 자신의 녹봉을 덜어 유궁(유궁 향교(향교))을 짓도록 돕고 고을 자제들에게 학문하기를 권장하였다. 직접 밭이랑을 다니면서 살펴 민세(민세)를 균등하게 하였으며, 평상시 옥송(옥송) 때 납부하는 비용을 모아 정해진 부세에 대신 충당하여 수세(수세)를 견감하니, 옥송이 공평하게 되었고 저축도 모자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전후로 맡은 6개 읍에 매번 떠난 뒤에 백성들이 사모하여 세운 비석이 있다. 청렴하고 검약하는 지조에 있어서는 깨끗하고 고상한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대대로 전하는 전택(전택)은 늘지 않았다.
자녀가 매우 많았으나 특별히 재산을 운용하여 산업을 마련해 놓지 않았으므로 사후에 가세가 더욱 쇠락하였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혹 그것을 알지 못하였으니 이는 평생 사람들과 응대하면서 가난함을 말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포부를 아직 펴지 못했다고 생각하여 평상시에 항상 뜻을 독실하게 하고 학업을 익혔으며 만년에도 해이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홉 번의 대과에 결국 합격하지 못하였으니 선배들이 모두 안타깝게 여겼다. 비록 과거 공부를 일삼았지만 어려서부터 연원(연원)의 학문이 있음을 알아서 성심을 다해 관심을 기울였으며 죽을 때까지 사그라지지 않았다. 조석으로 《중용》과 《대학》의 장구(장구)를 암송하기를 늙도록 그만두지 않았다. 자제를 교육할 때는 매양 말하기를,

“사람 된 도리는 위기지학(위기지학)에 있을 뿐이다.”
하였다.
만년에 일찍이 광주(광주) 선영 아래에 작은 집을 짓고 말하기를,

“지난날 벼슬길에 나간 것은 부모를 위해서였다. 내가 이미 연로한데도 벼슬살이를 하고 있으니 또한 영광이다. 내가 이제 한가롭게 농사를 지으며 여생을 보내고자 하는데, 계획을 비록 이루지 못하더라도 뜻은 이와 같다.”
하였다.
공은 함평 이씨(함평리씨)를 아내로 맞았으니 장양공(장양공) 종생(종생)의 후손으로 좌승지에 추증된 용계처사(용계처사) 영원(영원)의 딸이다. 시부모를 40년 동안 봉양하고 제사를 20년 동안 주관하였는데, 항상 말하기를,

“부모를 봉양하되 맛난 음식을 해 드리지 못하면 노인을 봉양하는 도리가 아니다. 제사를 모시되 임시에 제구(제구)를 마련하면 선조를 모시는 예가 아니다.”
하였다. 옷차림을 화려하게 하지 않았고 음식도 탐하지 않았지만 맛난 음식으로 봉양하고 나물의 제수를 올리는 것은 부족하거나 빠뜨린 적이 없었다. 자녀를 의리로 가르치고 인척을 예로써 접대하였다. 길쌈을 부지런히 하고 무격(무격)의 말을 멀리하였다. 집안을 다스림이 정연하였고 출납에 있어서는 더욱 신중하였다. 사양하거나 받는 때에는 감히 일호라도 공에게 누가 되지 않게 하였다. 대개 공이 여러 차례 백성들을 다스리는 수령 자리를 맡아서 청렴한 명성이 더욱 드러난 것이 또한 내조가 많았던 덕분이라고 하겠다. 기유년(1669, 현종10)에 공의 상을 당해 곡읍하며 상을 치르면서 수장(수장)이나 이따금 들더니, 겨우 4개월을 넘기고서 뒤이어 졸하였다. 임종 때에 자녀를 주위에 불러들여 사후의 집안일을 부탁하였는데, 흐트러짐 없이 차분하였다. 만력 경자년(1600, 선조33) 11월, 을사일인 5일에 태어나 경술년(1670) 4월, 임인일인 16일에 졸하였다. 그해 8월, 무술일인 14일에 공의 묘에 합장하였다.
6남 3녀를 두었으니, 장남 성보(성보)는 현령이고, 차남 성익(성익), 삼남 성필(성필)은 1년 앞서 요절하였다. 사남 성우(성우)는 진사이고 오남 성좌(성좌)는 생원시에 장원하였는데 전후의 부모상을 당해 견디지 못하고 요절하였다. 육남은 성량(성량)이다. 장녀는 정랑 이상우(리상우)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사인(사인) 윤돈(윤돈)에게 시집갔고 삼녀는 현감 윤경교(윤경교)에게 시집갔다. 측실의 아들은 성겸(성겸)이다.
성보는 감찰 이엄(리엄)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2녀를 두었고 아들이 없어서 성익의 아들 배하(배하)를 양자로 들이고 사위는 이도창(리도창), 박수조(박수조)이다. 사인 이광제(리광제)의 딸을 다시 아내로 맞아들였다. 성익은 참봉 이준성(리준성)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5남 1녀를 두었으니, 배우(배우), 배하(배하), 배상(배상), 배주(배주), 배한(배한)이고 사위는 윤자교(윤자교)이다. 성필은 군수 오달천(오달천)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아들이 없어서 성좌의 아들 배유(배유)를 양자로 들였다. 성우는 참판 홍처후(홍처후)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3남 1녀를 두었으니, 배의(배의), 배도(배도), 배문(배문)이고, 딸은 어리다. 성좌는 군수 조석록(조석록)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2남을 두었으니, 배휴(배휴), 배유(배유)이다. 성량은 참판 이익한(리익한)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1남 2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이상우는 2남을 두었으니, 이정(이정)과 이속(이속)이다. 윤경교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나의 선군자와 공이 동년 친구로서 매우 두터운 교분을 맺은 데다가 거듭 혼인 관계로 가깝게 되었으므로 어려서부터 훌륭한 집안의 장자(장자)의 풍도를 익히 들었다. 공의 여러 아들이 공의 일생 기록을 갖추어 나에게 주어 행장을 짓게 하였다. 내가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여러 아들이 기술한 바를 가져다가 위와 같이 차례대로 정리하여 채택을 기다린다.

출처: 명재유고 제43권